| |
 |
 |
 |
창업시의 시행착오 |
대정봉환(大政奉還), 폐번치현(廃藩置県)、명치유신(明治維新)의 폭풍우가 아직 진정되지 않은 1881년, 기쿠스이의 초대인 세츠코로(節五郎)는 약관 16세로, 숙부에 해당하는 당주 다카자와 세이로(高澤正路)로부터 술 제조권을 양도받아 양조장으로 생계를 세울 것을 결심했습니다. 이것으로 기쿠스이 주조가 탄생한 것입니다.
당시의 주조는, 현재의 순수배양과 효모첨가방식과는 달리, 곳간 내에 살고있던 효모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부패균이 자주 발생해 술이 하얗게 탁해져 부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실패와 성공의 반복 속에서 세츠고로(節五郎)는 시행착오와 고심 속에서도 양조장 형태를 정비해 1896년10월1일 정식으로 청주제조 면허를 니가타 현 지사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1905년2월 병으로 쓰러져 세츠고로(節五郎)는 고생 많던 생애를 마치고 장남인 슌타로(俊太郎)에게 그 뒤를 맡겼습니다.
|
|
| |
|
|
|
| |
천석 양조장으로의 성장 |
가업을 이어받은 기쿠스이 2대 ・슌타로는 타고난 호기심과 진취적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해 종래의 방법을 답습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고자 선진 각지의 정보를 모아, 실지 견학하고 그 이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미기 등도 다른 곳보다 앞서 도입하고, 판매량을 늘려 천석의 술을 저장하는 양조장을 소유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1922년 장남 도쿠지로(徳次郎)가 결혼할 무렵 제조는 나카구라(中倉)에서, 그리고 영업은 대대로 계승되어온 본가 가지 미카이치시 (加治三日市)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불황기였던 다이쇼(大正)에서 쇼와(昭和) 초기에 걸쳐서는 수요가 많은 소주를 제조하기 시작해 공급했습니다. 불황이 진정되기 시작한 1935년에는 주위의 열망에 따라 현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는 등, 정치 경제에 걸쳐 다방면으로 활약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슌타로(俊太郎)의 장남인 도쿠지로(徳二郎)는 잔병치레가 잦았지만, 아버지인 슌타로(俊太郎)의 부재를 지키고 가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1940년 슌타로는뇌출혈로 쓰려져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같은해 말 일가를 짊어진 도쿠지로도 신부전때문에 부득히 입원생할을 하였습니다. 이듬해 5월 42세의 젊은 나이로 아내(치요)와 세 자식을 남기고 도쿠지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장남인 4대째인 에이스케(英介)는11세였습니다. 가업을 친척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도쿠지로의 아내 치요는 스스로 가업을 꾸려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
|
| |
|
|
|
| |
곤경의 시기를 넘어 |
남겨진 치요는 사실상 제3대로서 분투하였습니다. 전황의 악화로 배급제도가 실시돼 청주 원료미의 삭감, 생산량의 점감으로 폐업 위기에까지 내몰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전쟁 중과 전후의 통제경제하에서의 원료 부족과 흉작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 행정기관과 시장의 혼란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견뎌내며 침체한 제조량을 점차 회복시키고 상품라벨을 칼라로 바꾸는 등 술의 상품화를 진행해 왔습니다. 1954년 장남인 에이스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양조장을 여자 손으로 지켜낸 것입니다. |
|
| |
|
|
|
| |
가업에서 기업으로의 변모 |
모친으로부터 양조장을 계승한 기쿠스이 4대 째인 에스케(英介)는, 대학 상학부에서 배운 실학 지식과 왕성한 도전 정신,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을 발휘해 양조장을 가업에서 기업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분투하였습니다. 당시 사원은 7명. 에스케 자신이 선두에 서서 「보통 정도의 회사」를 목표로 서서히 설비를 정비했습니다. 1956년 기쿠스이 주조 주식회사를 설립해 목제 통이 많이 남아 있던 낡은 술곳간을 새로 지어, 규모 확대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64년에 발생한 니가타 지진, 그리고 2년 후인 66년과 67년에 연속으로 카에츠(下越) 대수해가 발생해 양조장이 파괴되었습니다. 폐업으로 기우는 마음을 붙잡아 준 것은 후원해 주신 고객들과 에스케를 신뢰해 준 종업원, 그리고 가족이었습니다.
|
|
| |
|
|
|
|
좋은 술을 보다 많은 고객에게 |
1969년 4월 심기일전의 마음으로 현재 소재지에 새로이 양조장을 완성하고 3년 후인 1972년에는 업계의 전통적인 도시제도(杜氏制)를 폐지하였으며 선진 기계설비를 도입하여 합리화를 추진하는 등,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기쿠스이 주조」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양조한 그대로의 원액을 넣은 캔 『후나구치 키쿠스이 이치방 시보리』의 판매와 함께, 예전부터의 소박한 탁주를 이미지한 『니고리 슈 고로하치』를 발매해 가열처리를 하지 않은 생주(生酒)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확립하였습니다.
1978년 식생활의 다양화에 맞춰 폭넓은 요리에 대응할 수 있는 《기쿠스이 가라구치(菊水辛口)》를 발표하고. 1983년에는 「긴죠슈(吟醸酒) 본래의 맛을 많은 분들이 즐겨주길 바라는」 소망에서 《무칸테(無冠帝)》가 탄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품 증가에 따라 저장소의 규모도 매년 확대돼, 1993년 새롭게 기쿠스이 21양조장을 건설했습니다. 1998년에는 소비자의 작은 병 지향에 대응해 작은 병 라인도 증설하였다.
언제나 고객에 친근한 기쿠스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객이 기뻐하는 양조장 이미지를 목표로 한 개혁에 기쿠스이는 창업 이래 변함없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
|
| 번역 : 이 주헌 |
 |
|